배경
나는 2001년 4월 13일에 태어났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모 산부인과에서. 아빠는 71년생으로 당시 서른한 살, 엄마는 빠른 72년생으로 서른 살이었다.
엄마랑 아빠는 스물한살 때 친구 소개로 만났다. 1991년 9월 8일에.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9198, 910908, 9988 이런 숫자들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두분 다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시다. 엄마는 육남매 중 첫째, 아빠는 사남매 중 셋째였다. 엄마는 시내(도시)에서 자랐고, 아빠는 시외(시골)에서 자랐다. 아빠는 중학생 때까지 공부를 매우 잘 했는데, 고등학생이 된 뒤로 일탈에 빠지고 공부에 흥미와 동기를 잃어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강릉에 있는 모 4년제 대학을 갔고, 학사장교 제도로 전액 학비 지원을 받아 4년간 대학을 다닌 뒤 군입대를 하여 7년 동안 장교로 군 생활을 했다. 엄마도 공부는 꽤나 했었다. 다만 밑으로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고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해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택해 스무 살부터 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긴 연애 기간동안 둘은 중간 도시들에서 만났다. 대전에서, 원주에서, 논산에서. 아빠는 (아빠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엄마의 이별 통보에 시장 국밥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울다가 국밥 뚝배기에 고개를 박은 채 잠들었을 정도로 여린 사람이었고, 엄마는 기울어가는 집안 형편과 갑작스런 아버지(나에게는 외할아버지)의 죽음에도 악착같이 생활하며 다섯 동생을 뒷바라지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날 즈음 할머니께서는 이름을 잘 짓는다는 작명소에서 비싼 돈을 들여 이름 세 가지를 지어오셨다. 작명소의 실수였는지 할머니의 실수였는지, 그 세 이름은 여자아이 기준으로 지어졌었는데,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 세 개 중 가장 덜 여성스러운 이름을 고른 것이 지금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여자아이 이름으로 더 많이 쓰이는 이름이라 그런지, 유치원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매 학기 첫 수업 시간에 출석 체크를 할 때 듣는 말이 있다. 어, 남학생이었어?
엄마는 이십대 중반, 동생들 중 두 명이 성인이 되자 어께의 짐을 덜 수 있었고, 이십대 후반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경기도의 모 전문대학에 입학해 2년간 유아교육학을 전공했다. 99학번이었던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두 달 전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평점은... 4.5였다. 아빠는 7년간의 긴 군생활을 마치고 내가 태어나고 두 달 뒤 제대했다. 당시 계급은 대위였고 직책은 중대장이었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은 나의 출생과 함께 사회생활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유년
내가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느 마트에서 나 혼자 울면서 서 있던 일이다. 부모님이랑 같이 장을 보러 갔다가 어느 순간 혼자 떨어졌던 게 아닐까 싶다. 신기하게도 그 일은 3인칭 시점에서 화면을 통해 바라본 장면처럼 기억난다. 마트의 상품 진열대 사이 복도에서, 사람들이 카트를 끌고 지나다니는데, 그 한가운데 내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모습.
나는 성격이 원래 여린 편이다. 어릴 때는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우는 게 싫었던 부모님은 나를 많이 다그치고 혼냈다. 그래서 울음이 나오면 혼나거나 참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울음을 참느라 꺽꺽대는 소리를 내는 것도 아빠는 싫어했다. 친구랑 싸워서, 체육 시간에 넘어져 다쳐서, 귀갓길에 무서운 형들을 마주쳐서 등 갖은 이유로 집에 오며 울던 나였다. 그랬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면 거울을 보며, 아무 일도 없었어, 나 안 울었어, 라고 스스로한테 말하며 울음을 참는 나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감정을 억누르고 참는 법을 깨우친 나였다.
유년 시절의 기억 속 아빠는, 화를 잘 못 참는 욱하는 성격이었다. 잘해줄 땐 무척이나 잘 해주고 재밌게, 열심히 놀아 주는 아빠였지만 혼낼 때는 너무나도 무서운 아빠였다. 나는 많이 맞았다. 주로 내가 맞았던 도구는 효자손과 아빠가 군 생활 당시 사용하던 지휘봉이었다. 아직도 나는 아빠가 어렵고 무섭다. 기억 속 엄마는, 극진히도 남편과 아들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나를 때릴 때 말리지 못했고, 아빠가 뭔가 하자고 하면 해야 했다. 싫은 티를 내면 아빠가 화를 냈으니까. 그게 겁났던 건지, 싸우기 싫어서 고분고분하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가 불쌍하다. 어른이 된 뒤로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동생들을 위해, 애인을 위해, 남편과 아들과 딸을 위해 살아왔던 것 같아서. 그리고 아빠가 불쌍하다. 7년 간의 군 생활에서 남은 건 계급장과 지휘봉 뿐인 것 같아서. 군대라는 소사회 안에서 갓 나온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첫 직장은 어떻게 구했었을까. 30대 초반에 새롭게 시작한 직장 생활은 어땠을까. 전업 주부로 하루 종일 집에만 있게 된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도 안 통하는 작은 아이와 단 둘이 집에서 어떻게 지냈었을까.
지금도 잘 사는 편은 아니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은 형편이 썩 좋지 않았다.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했었다. 10년 넘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썼고, 다양한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케이블 채널은 없었다. 내 기억 속 어린이 채널은 EBS가 유일했다. 내가 가진 장난감은 엄마가 대학 생활을 하며 취미로 만들던 테디베어 인형들과 일 년에 딱 두 번 생일날과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주먹만한 자동차, 작은 블럭 세트 같은 것이 전부였다. 남자 아이들이 많이들 가지고 놀았던 유희왕 카드나 메이플스토리 딱지 같은 것도 없었다. 사달라고 하면 사주셨을 것도 같지만, 고작 여섯 살, 일곱 살이던 나는 눈치가 빨라서 장난감이나 카드놀이 같은 쓸모없는 곳에 돈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감사하게도, 부족한 형편 속에 부모님은 큰 다툼과 갈등 없이 가정을 꾸려나가 주셨다.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건 똘똘해지는 거였다. 네다섯 살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쯤은 돼야 읽을 수 있을 법한 문학 전집 책들을 읽었다. 이해도 안 되고 머리에 들어오는 건 없었겠지만, 그런 어려운 책을 읽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 그렇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나를 싫어해서 나를 자주 혼내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를 좋아할 만한 모습들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이랑 차를 타고 같이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나더러 잠시 차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두 분이 잠시 나갔다 온 적이 있다. 내가 말을 잘 안 듣고 나쁜 모습만 보여서, 이렇게 나를 차에 놔두고 영영 떠나버리는 건 아닌가, 이렇게 날 버리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며 차 안에서 불안해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때는 항상 올백 아니면 실수 한개, 였다. 엄마는 내색은 안 해도 은근히 내가 공부를 잘 하길 기대했다. 초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담감이 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귀여운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꽤 많이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2학년 때, 시험지 확인 시간에 몰래 답을 고쳐 적었다. 그러고는, 선생님, 저 채점이 잘못된 것 같아요, 하고 손을 들어 말했다. 무슨 깡이었을까. 답이 2번이었던 것까지도 기억 난다. 선생님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시고 말씀하셨다, 3번으로 체크한 거 아니니? 내가 적어두기로는 네가 3번을 답으로 적었어, 라고.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시험 부정행위였다. 방과 후에 선생님은 연구실(우리 학교는 교무실이 없고 연구실이 있었다)로 나를 부르셨다. 혼날 줄 알고 잔뜩 긴장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목소리로, 틀려도 된다, 틀리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라고 말씀해주셨다. 엄마는 그날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엄마는 OO이가 백점 안 맞아도 돼, 라고 했었다. (그 선생님은 엄청나게 엄하고 무서운 걸로 학교에서 유명한 분이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남학생들 잘 들어, 나중에 여자친구한테 넌 내 꺼네, 네 꺼네, 그런 말 하지 마.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기분 나빠. 당시 40대 후반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들었던 말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참 멋지고 앞서가시는 분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유년기라고 생각한다. 울면 맞았던 기억은, 감정을 숨기고 가짜 감정을 내비치는 능력을 낳았다. 화를 잘 못 참고 나를 자주 혼냈던 아빠였기에 나는 혼나는 일을 만들지 않고자 노력했고, 결국 시끄럽게 나대기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성격이 만들어졌다. 많지 않은 장난감만을 가지고 놀았던 유년 시절 덕분에, 내 물건을 소중히 다루고 아끼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년 시절에 물욕을 채우지 못했던 경험 때문에, 소유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집착도 생겼다.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비하게 되는 충동구매가 잦고, 여윳돈이 있으면 뭐라도 사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좋은 성적에 대한 강박 때문에 꽤 일찍 경험했던 부정행위는, 절대 꾀를 부리면 안 된다, 정직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을 확고히 해 주었다. 필요한 게 있어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거나 도움을 받기보다 직접 방법을 마련해 해결하는 게 옳다는 믿음도 유년 시절의 경험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부모님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많이 혼난 경험 때문에 그 애정이 내게 제대로 전달된 적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굉장히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첫인상만 보고 상대방을 ‘내 사람’과 ‘내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선 그어 버리는 안 좋은 습관도 가지고 있다. 본능적으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아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종종 듣기도 한다. 유년기의 나는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는 데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유년기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좋은 영향을 주었을까, 나쁜 영향을 주었을까.
소년
외동이었던 내게 여덟살 때 여동생이 태어났다. 우리 집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열네 살 중학생이 되면서 나에게 처음으로 방이 생겼다.
중학생 때... 나는 모범생이었다. 선생님들 앞에서,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어른들한테 모범생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일은 내게 너무나 어색하고 힘든 일이었다. 1학년 때는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다. 2학년 때는 공부는 약간 소홀하지만 과학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 학급 분위기에 관심이 많은 반장이었다. 3학년 때는 사회참여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회장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 선생님들에게 받은 믿음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연애를 하는 학생들더러 교무실로 불러서 공개적으로 혼내고 헤어짐을 강요하는 학교에서, 무려 2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아무 선생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심지어 내가 학생회장이었을 때, 당시 여자친구를 학생회 임원으로 추천한 선생님들도 계셨을 정도였다.
학생회장 일은 재미있었지만 나에게 맞는 일 같지는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더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통솔하고 이끄는 역할은 맞지 않았다. 친구들도, 나도, 학생회장은 선생님들의 의견에 맞서 싸워서 우리를 위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인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우리 학교는 생각보다 더 꽉 막힌 곳이었고, 학생회 활동은 정말 형식적이었으며, 생기부 기록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려 노력했지만, 학교에서 우리에게 학생회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도록 허락한 일이라고는 고작 교문 피켓 활동 따위가 전부였다. 옆 학교에서는 학생회장이 없어질 뻔한 체육대회를 다시 살려냈대, 하는 이야기들을 친구들이 내게 할 때마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리고 알았다. 나는 리더 자리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고등학교 1학년 첫 날, 학급 임원들을 정하는 날이었다. 결단코 아무 일도 맡지 않고 평범하게, 조용히 살 거라고 다짐한 상태였다. 중학생 때는 회계부장이라는 일이 없었다. 돈을 걷어서 학급비로 쓰는 일이 없었으니까. 담임 선생님께서 회계부장 일을 소개하실 때, 뭔가 관심이 생겼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학급 친구들의 믿음이 필요한 직책이니까 투표로 뽑자고 하셨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참여했고, 어쩌다 보니 내가 뽑혔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회계부장으로 활동했다. 일이 정말 많았다. 사립 학교인데도 학교 차원에서 학급에 지원해 주는 돈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게시판을 꾸민다던가, (분필 제외) 비품을 산다던가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학급 내에서 돈을 걷어 해결해야 했다. 아직도 아찔한 기억이 있다. 현금으로 모아 둔 학급비 봉투를 잃어버렸었다. 봉투를 잃어버렸다는 걸 방과 후 시간에 안 뒤로, 계속 안절부절하다가 저녁을 먹고 난 뒤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얻고자 찾아갔다. 웃으며 나를 보시더니, 선생님은 봉투를 건네 주셨다. 누가 바닥에 떨어진 걸 발견하고 교무실로 가져왔단다. 고작 35명에 대한 책임이지만, (특히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다수를 대표해 책임감을 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 뒤로 3학년 2학기까지 나는 매 학기 학급 회계부장이었다.
우리 학교는 좋은 학교였다. 아니, 좋은 학교인 줄 알고 갔다. 훌륭한 대학 입시 결과, 전교생 기숙사 생활로 조성되는 우수한 학습 환경, 깨끗하고 편리한 학교 시설들 등의 홍보 자료를 믿고 지원한 학교였다. 사실, 홍보 자료에 거짓은 없었다. 학교는 모든 것을 준비했지만 학생들이 그에 미치지 못했던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내가 기대했던 건 면학분위기였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은 수업 시간이던 쉬는 시간이던 놀기 바빴고, 어떻게 해야 무단외출을 다녀올 수 있을 지 고민하는 데 모든 머리를 쓰는 아이들이었다. 속된 말로 양아치라고 하는 유형의 아이들도 많았고, 기숙사라는 닫힌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간질과 다툼, 정치질은 지켜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한두 명 빼고는 거리를 두고 생활하기도 했다. 그 학교의 분위기와 친구들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거리를 두고 지냈음에도 나를 계속 껴 주려고 했던 소위 '인싸' 친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평생에 도움이 될 깨달음을 얻은 게 꽤 있다.
세상엔 미친놈들이 진짜 많다.
세상엔 나쁜놈들이 진짜 많다.
세상엔 죽었다 깨어나도 나랑 안 맞는 사람이 진짜 많다.
세상엔 나랑 마음이 맞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니다.
수많은 미친놈들, 나쁜놈들, 나랑 안 맞는 사람들은 신경 쓰면 안 된다. 그들은 그들대로 내버려둬야 한다. 개조하려 들면 안 되고, 나를 그들에게, 그들을 나에게 맞추려고 하면 안 된다. 안 맞는 건 안 맞는 거다.
2020.9.21. 04:49 - 1차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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