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꽤 인자한 선생님이셨다. 나이는 좀 있으신 편이었지만 흔히 '꼰대'로 불리는, '꽉 막힌' 분은 아니셨다. 나름 위트있고 학생들과 소통하려 노력하는 선생님이셨다. 이 선생님께서는 한 주에 한 시간, 첫 3분에서 5분 가량을 '생각노트'쓰기 시간으로 정하고, 즉석에서 주제를 내 주신 다음, 아이들에게 그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적게 하셨다. '생각'에는 제한이 없었다. 주제와 연관만 되어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나는 7살 어린 동생과 내 방에 있는 책들을 구경하다 그 '생각공책'을 발견했고, 2015년 3월 11일부터 11월 16일까지, 중학교 2학년인 내가 쓴 글들을 쭉 읽어 보았다. 첫 한 달은 세 줄, 그 다음달부터는 다섯 줄, 2학기 부터는 10줄, 학년의 끝에 가까워졌을 때는 12줄, 이런 식으로 제한된 시간은 그대로였지만 점점 써야 할 양은 많아졌었다. 여느 중2들처럼 나도, 띄어쓰기를 엄청나게 길게 하고, 글씨를 크게 쓰는 등 꾀를 부리며 글을 쓴 적도 많아 보인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이걸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었으리라 하고 짐작해 본다.
몇 가지 재밌는 글들을 옮겨 적어 봤다.
3.11 주제: 이학년의 첫 일주일
이학년의 첫 일주일은 나쁘지 않은 한 주였다. 새 학년에 올라오고 새 선생님, 친구들, 교실에서 생활하는 게 적응 되지 않아 힘들기도 했지만 첫 일주일부터 바빠 힘들다고 불평할 틈은 없었다. 동아리 신청 후 면접도 보고 학생회 활동도 하고 반장 후보로도 추천받았었다. 바빴지만 재밌는 한주였다.
3.16 주제: 우리 담임선생님의 첫인상
담임선생님의 첫인상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다른 친구들 몇명도 차가운 도시 여자같이 생겼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지내다보니 친절하고 재미있는 선생님이었다. 또,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젊으신지 신조어나 은어 등도 가끔 사용하셔서 친근감이나 동질감을 느낀다.
4.8 주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떤 의미인지가 헷갈린다. 우선 좋아하는 사람의 스타일이랄까, 그런 건 착하면서도 짖궂을 때가 있고, 진지하면서도 놀땐 잘 노는 그런 사람이 좋다.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니 내가 좋아하는 힙합 그룹 에픽하이의 타블로도 생각난다. 착하지만 짖궂을 때가 있고, 진지하지만 놀땐 잘 노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상향에 딱 맞는, 일치하는 사람 같다.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한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의지할 수 있는 여자친구랄까?
4.21 주제: 시험에 대한 생각
시험이 딱 1주 남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보는 첫 시험이다. 작년 4번의 시험은 나쁘지 않게, 그런대로 괜찮게 성적이 나왔다. 나태해져서일까, 작년 성적이 괜찮아서 크게 긴장하지 않는 탓일까, 시험이 1주남은 이 시점에서 난, 아무 걱정도, 대비도, 긴장도 하지 않고 있다. 시험보는 날 아침, 일어나서 무슨 생각이 들지, 그런생각도 든다. 이제 진짜 딱 1주 남았는데, 바로 코앞인데, 공부 해야 하는데. 너무 귀찮고 싫다. 이번 시험 잘 볼 수 있을까.
4.27 주제: 꽃은 피었다 지고…
모든 꽃은 피었다 진다. 봄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벚꽃은 이미 몇주 전 모두 졌다. 4월 말에서 5월 초에 활짝 핀다는 철쭉도 만개해 학교 건너편 철쭉공원은 예쁜 분홍빛을 내고 있다. 곧 있으면 여름이 오고 봄곷들은 못 보게 될 거다. 시험을 딱 하루 앞둔 지금, 어쩌면 삶은 곧 꽃이 피었다 지듯 잠깐 힘든 때가 왔다가도 다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힘들지 않은 때가 오는, 계속 반복되는 게 아닌가 싶다. 시험 전날이 되니 생각이 더 많아진다.
5.18 주제: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선생님이 칠판에 오늘의 주제를 적으셨다. 로마자로 적힌 말에 친구들이 영어라고 했는데 내가 아는 말이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 그 전부터 알던 말이고 작년 담임선생님께서 자주 언급하시던 말이기도 하다. 현재를 살라, 현재를 즐겨라 등으로 해석되는 이 말이 작년 담임선생님의 좌우면 비슷한 거라고 하셨다. 현재를 즐기라는 건 과거에 얽메이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지금을 집중해서 살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적당한 후회와 걱정은 좋지만 과한 후회와 걱정은 하지 말라는 그런 뜻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나간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라. 참 멋진 말이다.
6.1 주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경제력으로는 이미 1인당 GDP가 2만 5천달러를 넘어섰고,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다. 군사력도 세계 20위권이며, 사회적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민주주의 사회가 만들어져 있다. 이정도면 이미 완벽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더 크고 강력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 몇가지 있다고 본다. 우선 시민들의 의식이 많이 모자라다. 금연구역에서 흡연을 하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등, 선진국 시민으로서 부족한 면이 있다. 또한, 수직적인 계급 사회인 것도 문제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가족끼리 모였을 때 등의 상황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별이 조금만 덜하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모두가 자유로운 발언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15 주제: 내가 여행하고 싶은 나라
여행이라는 걸 많이 해 본적이 없다. 우리나라, 국내여행부터도 많이 해본 적 없고, 해외여행은 꿈도 꿔 본 적 없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는 여행 다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평소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나라들이 몇 개 있는데, 일본, 영국, 러시아, 미국, 캐나다 이다. 일본과 영국은 섬나라로서의 고유하고 특이한 문화 때문에, 러시아는 유럽부터 아시아 동쪽 끝 극동 지역까지의 광활한 영토와 그로 인해 생긴 다양한 문화들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는 전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 점 때문이다.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탓에 책과 방송, 인터넷만 보고 판단한 것이지만 말이다. 한 곳만 꼽으라면 캐나다다. 캐나다 거주 중인 한국인 디자이너의 책을 읽은 적 있는데, 캐나다 국내 관광지들과 그 나라의 일상 등을 읽으며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고 친절하며 여유로운 사람들이 산다는 걸 알게 되어서다. 아무렴, 아무 곳이든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8/24 주제: 여름방학동안 나에게 가장 의미있었던 일
지난학기 초부터 시작해서 한학기 동안 열심히 활동했던 학교 과학 동아리 활동들이 그 결실을 맺었다. 매일 쉬는시간, 점심시간마다 과학실에서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작업을 하고, 방학 후에도 관련 정보 수집, 체험(교육)을 받으러 다녀오고, 두어 번 정도 학교에 오며 활동을 해왔다. 날짜가 기억이 안난다. 방학 첫주 금요일에 학교를 가서 선생님과 3학년 선배 한 명과 같이 준비를 하고 그 다음날에 의정부의 경기 북과학 고등학교에 가서 동아리 발표대회 예선을 치뤘다. 준비가 급한 느낌이 있었고, 평소에 해보지 못한 일이라 긴장도 좀 했었다. 발표를 끝냈고, 그 결과는 2주 뒤 강릉으로 휴가를 갔을때 통보받았다. 본선에 진출했다고. 8월 14일 금요일에 다시 한 번 의정부 경기 북과학고에 가서 발표를 했다. 여전히 긴장했고 힘들었지만,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은 무언가 뿌듯했다. 본선 결과는 지난 목요일에 받았다. 동상을 받았다고 했다.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김영애선생님과 동우형과의 이 대회는 정말 의미있었고, 잊지 못할 추억이다.
9/7 주제: 나를 포함한 요즘 청소년들의 말투
정말 일부를 빼면 요즘 청소년들 사이의 대화는 비속어 없인 이루어지기 힘들다. 사용 빈도의 차이지 사실 비속어를 안 쓰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나도 그렇다. 평소에 많이 쓰는 건 아니지만 짜증날 때, 화났을 때, 놀랐을 때는 튀어나오는게 사실이다. 또 다른 건 줄임말, 신조어, 게임용어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은어의 사용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 등 전자기기와 함께하는 우리 청소년들은 더 빠르고 독특한 방식으로 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말들을 창조해 낸다. 청소년들끼리만 알아듣고 다른 연령대는 알아듣기 힘들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언어의 특성중 하나인 창조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신조어와 줄임말은 이미 예전부터 많이 만들어져왔던 것이고, 게임 용어도 게임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이지 언어생활에는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나는 요즘 청소년들의 말투가 많이 다르기도 하고 문제가 되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10/5 주제: 이 가을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가을날, 요즘엔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처럼 내 마음도 맑아지기는 무슨, 벌써 가을인가, 연말이 다가오는구나, 올해는 뭘 했지, 연초에 세운 계획중에 제대로 지켜진 게 있나 하는 생각들이 들곤 한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 (매일 4시간 복습, 노트정리하기 등)들은 작심삼일이 아닌 작심삼초로 단 한번도 지켜진 적이 없고, 올해나 작년이나 여태까지 뭘 했다 생각해보면 놀았던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이 날씨 좋은 가을날, 그냥 다 잊고 여행이나 다녀오고 싶다. 기차타고 떠나는 춘천 여행이든, 가볍게 자전거 타고 다녀오는 한강변 여행이든, 그냥 떠나고 싶다. 사실 지난 토요일, 아는 선배가 간다는 고등학교가 궁금해 입시가 시작될 직전의 마지막 입학설명회에 가느라 친구 한 놈과 천안에 갔다. 만나는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져 급행열차 전철을 놓치고 완행열차를 타며 천천히 한 역 한 역 멈추면서 가는게 시간이 부족할까 걱정되면서도 여유같은게 느껴져 좋았다. 열차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 시골 농촌의 풍경, 다시 도시의 풍경 이렇게 바뀌어가는 바깥모습도 구경하고 그냥 도착하기까지의 기다림? 그런게 왠지모르게 좋았다. 설명회가 끝나고 처음 가본 천안 거리를 걷는 그 새로운 느낌도 좋았다. 여행이랄것까진 아니었지만, 그냥 좋았다. 그 좋은 기분 느끼러 맨날 여행을 다녔으면 싶다.
11/9 (1) 주제: 나를 감동시킨 한 권의 책
나를 감동시킨 책은 만화책이다. 일본의 만화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쓴 슬램덩크가 그 책이다. 처음엔 그냥 농구가 좋아서 찾아보게 됐는데, 처음부터 농구가 아닌 일진 만화같은 내용이라 의아해했다. 내용은 단순한데, 일진이었던 남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 만난 농구를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관심이 생겨 잘 보이기 위해 농구를 배우고 성장해가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땐 단순한 내용 같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이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 점차 여학생에게 관심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고 싶고 진심으로 농구가 좋아서 훈련하고 연습하는 모습이 별 것 아닌데 감동적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하고싶은 것, 내 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도 됐었다. 실력이 안되지만 넘치는 자존심과 자만함으로 언제나 도전하는 주인공 강백호가 처음으로 넘을수 없는 벽을 만나 좌절하는 모습에선 연민이 느껴졌다가도 주먹을 쓰지 않기로 맹세해 화를 참는 모습은 웃음이 났고, 어느새 몸도 마음도 실력도 크게 성장한 마지막 장면에선 뿌듯함도 느껴졌다. 다시한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고 싶다. 이번에 다시한번 본다면 느낌이 색다를것 같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1인당 gdp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202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