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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기록

인간의 탐색

인간은 ㅇㅇㅇ이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교수님께서 오늘 수업에서 말씀하셨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의 과정을 거친다. 만남을 이어가다 보면 잘 맞는 사람도 있고 너무 싫은 사람도 있지만, 우리 모두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계속해서 타협점을 찾아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지만, 그 중 가장 개인적인 것 같은 문제라도 다른 사람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서다.

높은 도덕성의 발현 경험


 고등학생 때 저는 3년 내내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여기 졸업한 남자애들은 군대 갔을 때 안 힘들어한다는 말이 선배들에게서 전해 내려올 정도로 규율이 엄격하고 생활이 규칙적이었습니다. 아침 6시 30분이면 기상 곡을 들으며 일어나 10분 내로 운동장에 모두 집합해서 점호와 체조, 구보를 하며 일과를 시작했고, 저녁 11시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다시 각자의 호실에서 점호를 한 뒤 12시까지 취침 준비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식이었습니다. 평일에는 병원 등의 사유가 아니면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고, 주말에는 집에 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토요일 오전에 귀가했다가 일요일 오후에 귀교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였던 학교라 친구들의 거주지도 다양했는데, 집이 학교에서 먼 친구들은 주말에도 학교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답답하고 억압적인 학교 생활이었지만, 저희는 그 속에서도 약간의 일탈을 하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지냈습니다. 제가 쓰고자 하는 인격적 책임 발현의 경험 이야기는 ‘무단 외출’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외출은 학교 선생님과 기숙사 선생님에게 각각 외출증을 받아 소지한 채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친구들은 방과 후 시간, 저녁 시간 등을 틈타 학교 앞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고 들어오거나 학교 근처 PC방을 다녀오는 등의 ‘무단 외출’을 했었습니다.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경비원 아저씨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실 때 나갔다 들어오거나, 쪽문 혹은 뒷산을 통해 나가는 등 어떤 때는 액션영화를 방불케 하는 위험천만한 길로 무단 외출을 하고는 했습니다. 사실, 제가 졸업을 하고 나서 정말 많이 후회하는 것은 무단 외출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학교 안에서도 많은 추억이 있었지만 졸업을 한 뒤 친구들과 만났을 때 나눈 이야기들은 ‘저녁 시간에 몰래 나가서 다녀왔던 치킨집’, ‘방과 후 시간에 무단 외출을 했다가 밖에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외출증을 받고 나왔다며 너스레를 떨며 넘어갔던 일’, 그리고 ‘모의고사가 끝나자 마자 무단 외출하여 저녁 점호 직전에 겨우 들어왔던 날’ 등 무단 외출에 대한 추억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도 눈 감아주시는 편이었습니다만, 저는 고등학생 시절 왠지 알 수 없는 정의감과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인격적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든 무단 외출의 유혹과 권유를 뿌리치고는 했습니다. 정직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당연히 항상 중요하지만… 때로는 일탈의 재미도 느껴볼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요새도 친구들을 만나면 저는 무단 외출 안 하던 ‘쫄보’ 등으로 불립니다. 도덕성과 인격적 책임감에 못 이겨 규칙을 지키며 생활했던 과거의 저를 돌아보면 많은 생각이 듭니다.

삶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


 어떤 삶이 지혜로운 삶일까?

 삶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먼저 해결해야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며 지혜와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 왜 삶에서 지혜를 찾으려 할까? 우리의 출생에 의도는 없다. 삶에도 의도나 이유는 없다.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며 지혜를 얻고, 지혜로운 삶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언젠가는 삶의 끝을 맞이할 것이니까. 우스갯소리이지만 우리에게 왠지 모를 충격을 주며 떠돌았던 "짤"이 있다. 어차피 당장 내일 교통사고로 죽을 지도 모르는 인생이니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하는 글이 내용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문득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특별한 의도나 까닭 없이, 그저 태어난 김에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막상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소위 "막 사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과 시스템을 따르고 뚜렷한 목표나 목적이 없더라도 수십 년 씩이나 인생을 이어간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규칙을 따르도록, 사회화라는 명목 아래 교육하고 세뇌시킨다. 사회 시스템 속에서 보편적인 삶의 방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고작 지혜라고 하는 것이래봤자 "어떤 태도로 삶에 임해야 하는지"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큰 틀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회에서 똑같이 살고 있는 것이니까.

 나는 배움이 너무나도 부족한, 일개 대학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삶에서 지혜를 찾아가는 일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라서 하찮게 느껴지는 것일 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사회의 흐름에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세상을 "막 살기만 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걸 알기에 나 역시도 그들 중 하나로,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나조차도 특별하지 않으면서, 지혜를 찾는 사람들을 더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지혜가 무엇이고,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삶에서 지혜를 찾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이런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다 보면 머리만 복잡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삶이 지혜로울 수 없다고. 결국 나도 고민과 선택이 수없이 반복되는 시간들을 보내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싶다.

현대인의 욕망추구행위


 현대인의 욕망추구행위는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말로 설명하기 힘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이기에 나쁜 것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이 과해지고 사회에 의해서 강요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오늘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윤리’였습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즉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곧 윤리일 텐데요, 평소 옳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정말 많고 고민이 잦은 저조차도 어떤 것이 정답인지를 생각하려 하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윤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기준은 과연 윤리라는 이름을 부여할 만큼 옳은가 하는 생각을 늘 하고는 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구에 의해 발생하고 인간의 행복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인데, 사회는 윤리라는 명목 아래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조종합니다. 결국 사람이 윤리를 따르면 어느 만큼이든지 간에 행복의 정도가 낮아짐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욕망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행위를 바라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더 많이 먹고 싶고, 더 넓은 공간을 가지고 싶고,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편하고 윤택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는 일은 비난하면 안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과도 연관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대인의 과도한 욕망추구행위가 비난받아야 하는 지점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욕망 추구일 때라고 봅니다. 자신의 행복이나 다른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행위이겠지요. 이를테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위해 명품을 구매하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힘들고 어렵지만 단가가 높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회의 시선과 강요 때문에 하고싶지 않은 공부를 하고, 하고싶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 등의 행위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욕망추구행위의 예시로 적절할 듯합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욕망추구행위가 사회에 의해 강요되어 오고 있고, 현실의 벽 앞에 그 강요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겠습니다. 각자의 행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행할 자유가 있음에도, 사회의 분위기에 맞추어 물질적인 욕망만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현대인들 중 한 명이기에 정말 괴롭기도 합니다.

 올바를수록 불행하다면


 오늘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주된 내용은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잘 알려진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는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상부의 지시만을 따르다 보니 악한 행동을 악한 것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그의 군인시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의 의견을 편히 말할 수 없는 분위기인 군대라는 집단 내에서, 부조리나 인권 침해를 보더라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게 되는 분위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중에 군대를 갔을 때 나의 생활이 걱정되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집단이기에, 각 구성원의 개인적인 사고 자체를 억제하는 분위기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올바른 행동을 할수록 불행해지고, 악한 행동을 할수록 행복해지는 세상이라면, (교수님께서 살짝 언급하셨듯 지금의 세상도 이미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다) 나는 올바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흔히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을 치켜세울 때 하는 말이, '나라면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일본 군부에 맞서 목숨걸고 싸우기보단 그들에 동조하며 편하게 살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 분들이 더 대단하다' 하는 식의 말들인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올바르지 않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과연 올바르게 살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부터도 나의 행복을 우선시할 것만 같다.

 나는 공대생이 싫어요 (중간고사 대체과제)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에 대한 고민이 가장 깊은 시기가 사춘기라고들 한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사춘기를 겪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성격은 어떠한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느 시간과 장소에 편안함을 느끼는지,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지, 타고난 재능은 무엇인지.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에 대해 돌아볼 때면 항상 의문이 따라오고, 무언가를 결정할 때면 나 자신의 선택을 믿지 못해 기나긴 고민에 빠진다.

 나는 세상을 잘 모른다. 유년 시절에도, 소년 시절에도, 성인이 된 지금도, 세상을 모두 알기에는 내가 너무나 어리고 부족하다는 걸 항상 느껴 왔다. 각자 목표와 가치관과 성격과 취향과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넓은 세상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 질투와 혐오를 모두 이해하기에 나의 배움과 공감 능력은 너무나 모자라다. 아주 짧은 기간밖에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지만, 부모님의 영향인지 성장 배경의 탓인지 나는 항상 “무엇이 옳은 것일까”에 대한 답을 찾고자 고민하며 살아왔다.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내전, 권력자들의 싸움에 희생당하는 민간인들, 인권 탄압과 언론 통제, 소수자 차별과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나의 깊은 생각을 꺼내어 말할 때면, 나는 “진지충”이 되고, “정치충”이 된다.

 사실, 대학이라는 곳에 속하게 되면 꼭 하고 싶었던 게 그런 것들이었다. 내가 가진 생각을 꺼내고, 다른 사람이 가진 생각을 듣고.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세상이 될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나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대학생이 되기 전에 내가 역사 속에서 봐 온 대학생의 모습이 그랬으니까. 공장에 취업할 것도 아니면서 노동 문제를 바꾸고자 거리로 나서고, 공부만 하면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는데도 민주화 투쟁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한번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나는 “진지충”이고 “정치충”인 걸까. 왜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 끝에 나는 지금의 대학생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과거의 대학생들보다 조금은 더 많이 노력하고 있는 현실 때문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올바르고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어쩌면 2020년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공대 유머(공대 개그)”라는 게 한동안 유행했었다. 공대생, 넓게 잡아 이공계열 전공을 공부하는 사람들 전부는 약간의 조롱과 비하가 섞인 농담의 소재가 된다. 이들에게 흔히 부여되는 이미지는 며칠 밤을 샌 듯 보이는 눈과 머리, 계산기 혹은 컴퓨터 키보드를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 세상만사에는 관심이 없고 알 수 없는 수식과 기호들을 사용하며 책상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생활, 어딘가 사회성과 공감이 부족해 보이는 대화 내용과 행동 같은 것들이다. 유머 소재로서의 공대생들은 좋게 이야기하면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공부 열심히 하는 순박한 청년”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세상물정 모르고 사람 대하기를 어려워하는 헛똑똑이”다. 그러나 나조차도 그런 선입견, 나아가 편견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 그런 편견과 부합해 보이는 공대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거리를 두게 된다.

 이과생이 문과생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공대생들의 “공감능력 부족”을 삼 년 내내 봐 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통적으로 이공계열에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과반”, 혹은 “공대”라는 작은 사회 안에는 흔히 “남자”하면 떠올리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사나이는 말보다 행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며, “계집 년”같은 남자들은 놀림거리나 비난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가득하다. 실은 나 역시도 어느 정도 그런 분위기에 동조하고 따랐던 편이었다. 다수가 동의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다수에 반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어려워진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초 집단들이 여전히 그렇다.

 공대생들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벌며 살 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가치관과 마음가짐을 지키며 살 지에 대한 것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중요해지는 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꼭 이공계열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학문을 닦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감수성이 부족하고 공감이 어렵지 않도록 유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와 주변 세상에 대해 진심을 담아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험, 그를 통해 다른 이들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이 과목을 특히 애정했고 정성을 담아 성실하게 임하려고 노력해 왔다. 프로네시스 세미나나 크로스오버와 같은 과목은 많은 학생들이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는 과목이지만, 따분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고 더 즐겁고 실천적인 활동 과제 위주로 편성하여, 필수교양 과목으로서 더 비중 있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미래를 인류에게 묻지 마세요 (기말고사 대체과제)


 크로스오버 1 과목을 수강한 이번 학기는, 이 과목이 이공계열 학생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 과목인 것과 관계없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인문학 교육의 인기와 상관없이, 그저 인간의 삶과 관련한 내용에 대해 편하게 수업을 들은 뒤 짧게나마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 모든 활동이 유익하고 긍정적으로 다가왔던 한 학기였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어문계열이든, 이공계열이든, 상경계열이든, 예체능계열이든, 삶을 살면서 계속해 나가야 하는 일이다. 내가 문학을 공부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기계를 다루더라도 나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내가 경제를 공부해 나가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예술을 창작하더라도 삶에 대한 탐구와 고민이 필요하다. 수많은 생명체가 공존하는 이 땅이지만, 이곳을 가장 널리 지배하고 있는 건, 가장 활발하게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감정과 이성, 욕구가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관계가 있고, 관계에는 오해가 있고, 오해는 다툼으로 이어지고, 다툼은 관계를 망가뜨리고 감정을 상하게 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들을 삶에서 겪으며 지낸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며,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은 이성을 더욱 발전시킨다.

 이번 학기 후반부에 크로스오버 1 과목에서 다루었던 주제들 중 나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것은 10주차와 11주차의 “기술적 인간”이라는 주제였다. 선사 시대에 주먹도끼를 손에 쥐던 인간이 21세기에 스마트폰을 손에 넣고 다니기까지, 인간의 삶과 함께하는 도구와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여럿이 맨손으로 사냥하던 짐승을 사냥 도구로써 한두 명이서도 포획할 수 있게 되었고, 수백여 년에 걸쳐 이루어지던 대륙 이동이 배의 발명으로 몇 개월까지 단축되었다. 다른 인간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은 대화 뿐이었지만, 통신 수단의 발명으로 편지가 생겨났고, 그도 귀찮아진 현대인들은 통화와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전에 없던 수준으로 바꾸어 놓고는 하고, 그 변화의 빈도는 점점 더 잦아지며, 변화의 정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인류는 당장 한두 달 뒤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한 시대상 속에서, 어쩐 일인지 인문학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반지성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이 우려될 정도에 다다르기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무언가 더 “편리해졌다”라고 느끼고 믿지만, 그 믿음에 의심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면전에서 서로 대화를 하는 대신 문자 메시지를 활용하는 것이 정말 “편리”하고 “행복”한 것인지, 두 다리로 걸어 이동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보다 빠른 교통수단으로 두 점만을 이동하는 것이 정말 “편리”하고 “행복”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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